“한국이 강한 민주주의로 나가려면
무엇보다 발언의 자유가 중요합니다”
법의 정신 대신 법구만 수입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시민 스스로 발언의 자유 통해 법질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민간 주도의 차별금지 자율 규제를 그 대안으로 제안
‘발언의 자유의 신장’ 이라는 방향은 맞지만 그 내용은 기존 권위주의 정부가 써온 진흥법 등을 만드는 관 주도가 아니라 시민들의 자치성이 강조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미국도 이런 표현의 자유가 무한 보장되는 것만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명예훼손, 음란물, 증오선동 등은 보호받지 못하는 발언이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증오선동에 덧붙여 가짜뉴스 유통 등을 규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교수는 유럽적 법제화보다 발언의 자유를 원리적으로 보장하는 미국적 전통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KISO: 증오 발언을 규제하는 것에 대해서 필요하다는 의견 등이 많고 독일 등에서는 이러한 법안이 시행중입니다. 또 차별 금지법 등을 통해 특정인을 차별하는 발언은 처벌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고 이러한 규제는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준웅 교수: 증오발언(hate speech)을 장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증오발언을 규제하는 법안이 과연 차별을 완화하는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지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란 증오 발언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깨끗한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 깨끗한 사회가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바람직한지도 의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소수자나 약자가 실제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입니다.
증오발언에 대해 연구해서 최근 <말이 칼이 될 때>라는 책을 펴낸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과)님도 증오나 혐오 발언을 형법으로 규제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중요한 것은 차별의 철폐이지 발언의 규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증오나 혐오를 표현하는 발언을 규제하는 법을 만드는 일은 위헌입니다. 독일에서는 증오 선동을 포함해서 일련의 증오관련 발언을 처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이 미국보다 더 인종차별이 없는 국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미국식 자유니 독일식 규제니 하고 양 쪽 가운데 한 쪽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주주의 전통에 따라 우리 시민들이 스스로 원칙을 형성하고 그것이 법이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혐오발언은 증가추세다. 지역이나 정파에 대한 혐오에서 요즘에는 여성이나 종교에 대한 혐오가 등장하는가하면 그 수위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 교수는 이런 혐오발언에 대해서도 자율 규제를 강조했다. 그는 성별·종교·인종과 같은 분야의 차별에 대한 자율적 규제는 다양한 목소리를 보장하기 때문에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이끌어내 시민사회를 강건하게 만드는 토대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런 자율규제가 인권보호와 표현의 자유 두 부분을 모두 이끌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발언의 자유’라는 풀뿌리가 시민의식이라는 나무로 자라고, 그 나무들이 모여 민주주의라는 숲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이준웅 교수: 저는 포괄적으로 차별금지법안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증오범죄를 가중처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시민의 발언의 내용을 따져서 규제하는 데 반대합니다. 비록 그 발언이 혐오나 증오를 표현하는 경우라도 말입니다. 저는 이런 발언에 대한 규제는 개별 사업장, 학교, 조합, 협회 등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얼마든지 채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증오나 혐오를 표현하는 개인을 채용, 평가,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사적 영역의 단위에서 해당 단위에 포함한 개인들이 규칙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그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전면적으로 그런 규제 규칙을 만들어 사적 영역에 강요하는 데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강요야 말로 시민성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발언에 대한 규제는 시민사회의 강건한 자기 형성의 논리를 따라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강건한 민주적 문화’를 뜻합니다. 이는 ‘비차별적인 발언의 자유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비차별적 발언의 자유’를 통해서 시민 사회의 각종 단위에서 논의를 통해 특정 발언을 규제하는 ‘자율규제안’을 만들어 각종 단위에 스스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 고용자가 많은 회사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금지하기로 구성원끼리 합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회사에서 성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주고 성차별 금지 교육 6시간 같은 일정한 불이익을 부여해 규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런 규제를 회사 내의 노조나 협의회, 또는 이사회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자율적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방향이 올바른 차별 금지의 방향이고 증오 발언을 실제로 줄일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래 동안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원래 범죄의 동기가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차별이나 증오를 이유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범죄를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차별이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인식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증오범죄가중처벌과 ‘증오발언에 대한 국가의 규제’는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발언의 내용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역시 문제가 됩니다. 민주적 시민성 자체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발언의 규제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대로 각 민간 영역에서 회사, 학교, 협회 등 영역별 구성원이 직접 규칙을 형성하는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KISO: : 차별금지법 제정이 차별에 반대하는 것을 명확히 한다는 점은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반이 될 수 있나요? 그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십시오.
이준웅 교수: 차별금지법은 고용의 기회 등과 같은 기본적 자원을 배분할 때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주로 합니다. 일단 차별금지가 명문화되어야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법이 명령하는 대로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기회를 더욱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차별반대 발언을 기초로 사적 영역에서 차별을 정당화는 발언 등을 자율적으로 규제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새로운 규칙이 될지 말지는 해당 사적 영역의 내부 토론과 의결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설득이 성공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패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실천이고, 발언의 자유를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발언을 해야 하고 어떤 발언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각 회사, 학교, 협회 마다 내부 규칙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차별금지법에 기초해서 자율적으로 발언을 규제하는 규칙을 제정하는 방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와 인권보호를 다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우선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발언자가 차별적 행위에 대한 인식(awareness)을 증가하도록 유도합니다. 따라서 인권의식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로, 자율적으로 채택한 규칙이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위협하거나 다른 인격권을 훼손할 때, 왜 그러한지 검토하는 방식으로 발언의 자유에 대한 인식도 같이 높일 수 있습니다.
사적으로 특정 집단 내에서 특정 내용을 말하는 일을 벌하는 내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규가 공적인 사안에 대한 개인의 발언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특히 정부가 나서서 그런 침해를 ‘진흥’이라는 명목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입법의 근원이 되는 여론형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민의 민주적 토론능력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정헌법이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 자유가 시민사회를 이루는 정치적 자유의 근간이 됐다고 하지만, 미국 정부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당연히 미국도 이런 시도가 있었다. 정부가 관련 혐의자를 법정에 세우기도 했다.
발언의 자유가 자치정부를 전복하려는 내용처럼 정부의 안위와 충돌한다면 제한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를 제시했던 인물도 있었다. 1971년 미국의 보수 성향의 판사인 로버트 H 보크(Robert H Bork)는 ‘중립의 원칙과 수정헌법1조의 과제’라는 논문에서 “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 한다는 식의 정부 위협 발언은 정치적 발언이 아니며 규제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보크 판사의 이 논문은 이후 무수히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무엇보다도 정치적 발언을 좁게 해석함으로써 정치는 물론 문학 예술 등의 다른 분야 담론마저 규제가 가능하다는 잘못된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이 논문은 이런 악명 탓인지 법률 논문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가운데 하나라고 위키피디아는 적고 있다. 결국 보크 판사는 보수정권이었던 레이건 정부 때인 1987년 대법관에 임명됐지만 보수적 성향 등을 이유로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하고 낙마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법부는 발언의 자유를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해왔다. 미 사법부는 발언의 자유가 다른 기본권과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해당 사건이 발언의 자유 적용 영역(coverage)에 속하는지 판단하고 그 영역 내에서 발언의 자유 보호 수준을 고려해 결정해 왔다. 이는 기본권간의 충돌 문제를 특별 이익형량으로 해결하는 유럽의 전통과 확연히 구분되는 방식이다.
짧은 수정헌법1조 구절을 기준 삼아 법적 원칙을 구성해야 하는 미 법원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법론이라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었다. 이후 미국 법원은 발언의 자유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이익형량의 방법론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확인해왔다. 표현의 자유가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는 이익형량의 관점에서 사법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 우리의 전통과도 확연히 다른 점이다. 표현의 자유가 정권이나 재판관에 따라 그 기준이 상시적으로 바뀌는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전통이다.
KISO: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각 권리에 대해 비교형량을 검토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KISO의 심의도 알 권리, 표현의 자유와 이용자의 피해를 비교형량하고 있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이런 표현의 자유의 비교형량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발제를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준웅 교수: 권리의 이익형량을 누가 결정하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는 모든 가치의 순위, 질서, 위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치의 순위, 질서, 위계에 대해서 최종 답변을 제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철학자 가운데 누구도 가치 체계의 질서에 대한 최종 답변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등에 의하면, 오히려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의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요컨대, 기독교적 가치와 불교적 가치 중 어느 쪽이 근본적인가? 이런 질문에 누구도 최종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적인 관점이며, 또한 민주주의의 관점이라고 봅니다.
한국에서의 이익형량은 구체적 사건에서 결국 판사가 법률과 양심에 따라 결정하는데, 판사는 어떠한 가치 체계에 기반하여 이러한 가치 간의 우열을 다룰까요? 물론 헌법에 등장하는 가치가 있습니다만, 이런 헌법적 가치가 상충할 때, 예컨대 발언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충돌할 때 법원은 어떠한 판단을 해야 할까요? 이런 판단을 정당화하는 원리를 형성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헌법 상에서 최상위 권리들이 나열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 간 위계성이 아니라 차별성만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적 헌정질서의 근간이라고 봅니다.
사실 법의 형성 자체를 일종의 논변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수정헌법1조의 전통이 이런 논변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발언의 자유 조항은 원래 다른 자유에 비해 더 우월하다 또는 열등하다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수정헌법1조 전통 자체는 발언의 자유라는 가치를 국가의 안보, 사회질서, 공인의 명예 등과 같은 다른 가치와 견주어 판단한 무수한 판례들을 통해 만들어 진 겁니다. 수정헌법1조의 전통이 만들어 낸 판례를 따르다보면, 발언의 자유가 민주적 정당성을 낳은 원천적 권리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런 인식 자체가 무수한 판례들 속에서 만들어진 ‘논변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미국에서 발언의 자유는 어쩐지 다른 가치에 앞서는 최우선의 가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저는 이는 착시라고 생각합니다. 수정헌법1조 전통에 녹아있는 논변을 따르다 보면 그렇게 보이는 일종의 착시라는 겁니다. 저는 가치 간의 대립을 놓고 ‘이익형량’의 관점을 따르는 것은 어쩐지 불안정하고 납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개별 사례에 다원적인 원리를 적용해서 논의하는 ‘논변과정’으로 보면 납득이 갑니다. 개별 사례에 담긴 논변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타당성을 스스로 입증하는 원리를 채택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수정헌법1조의 전통이 왜 ‘이익형량’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KISO: 한국의 사회적 환경은 수정헌법 1조를 강조하는 미국보다는 대륙법 체계를 따르는 독일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선생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준웅 교수: 미국 예일대 제임스 휘트먼 교수(James Whitman)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의 시민적 평등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모두가 귀족으로 대접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시민들이 서로를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었다면, 미국은 특권 계층이 폐지되는 형태로 ‘누구도 나에게 함부러 명령할 수 없다’는 원칙으로 구성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휘트먼 교수의 글을 읽다보면, 비교법적 사안을 논의하면서 ‘유럽이 더 좋다’ 혹은 ‘미국이 더 좋다’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각자의 경험에 맞게 법문화가 형성되는 것일 뿐입니다.
각 국가별로 근대화 과정이 다릅니다. 가까운 일본은 확실히 유럽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또 다릅니다. 일본이 유럽처럼 모두가 사무라이로 대접받는 세상이 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르죠. 한국은 미국식과 유럽식 중에서 어느 형태에 가까운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미국이나 유럽과 또 다른 근대화를 거쳐서 법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명예관념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나라에서 명예관념은 미국의 성취주의와도 별로 관련이 없고 유럽의 귀족문화와도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욕설의 종류와 강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욕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발제문에서도 밝혔지만, 이러한 법문화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외국의 법안을 우리의 필요에 따라 그대로 수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그때그때 필요한 법과 정책을 외국의 선진 사례에서 수입하면 된다는 식으로 논의하는 편입니다. 모든 정부 보고서가 미국의 사례, 유럽의 사례, 일본의 사례를 담고 있는 데, 이는 우리의 정신적 정향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저는 법의 형성을 일종의 논변과정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법의 형성은 논변의 생산이 아닌 수입에 그친 감이 있습니다. 이런 법률의 수입은 결국 부작용을 일으킬 우려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발언의 자유도 증오발언 규제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안과 정책 문안을 수입할 뿐 그 정신이나 문화가 함께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서, 이런 식의 수입은 시민성을 강화하고 실질적으로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입 주체인 정부에 대한 의존도만 높아지고, 시민들은 스스로 논변을 통해서 법문화를 구성하는 관점을 갖지 못합니다.
저는 문재인 정부는 더 이상 ‘단기적으로 좋은 법을 수입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무슨 ‘진흥법’ 같은 것을 남발하는 데 주의해야 합니다. 그보다는 장기적으로 법과 규칙을 스스로 형성하는 시민적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물론 이런 시민 문화는 단기간에 형성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건 다른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법문화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수정헌법1조 전통도 단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민주적 법질서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의 견해를 포함한 다양한 의견이 활발하게 교환되는 조건에서 사회적 논변을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민주주의란 설득력있는 논변이 결국 법으로 만들어지는 체제인 것입니다. 각 사회마다 고유의 역사성과 경험이 논변과정에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미국에서 미국식의 법문화가 만들어지고, 독일에서 독일식의 법문화가 만들어지듯이, 우리도 우리 민주주의의 고유한 역사성과 경험을 반영한 논변의 결과물을 법으로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준웅 교수의 발제문과 인터뷰를 통해서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 기초 가운데 기초라는 점과 이런 중요한 가치가 시민사회와 함께 성장해야 하는 것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2016년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표현의 자유 관련 국정과제는 어떻게 해야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수정헌법에 기초한 강한 민주정 국가들을 그저 부러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2016년 시민혁명 이후 국민이 정치의 실질적 주권자로서 개개인으로서 국민을 의미하며 개개인이 권력의 생성과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주체로 명시한 점을 주목했다. 이는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전통이 강조하는 문제의식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이런 새로운 국민의 개념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 독립성 확대라는 선언이 단순히 수사적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문재인 정부가 시민성 강화전력 같은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시민들의 발언의 자유 보장을 위한 법제도의 전면적인 정비 △시민들의 자율성 신장을 위한 권한행사 경험의 제공 △정부 내 각 기구의 간섭적인 규제정책의 일괄 정비 등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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